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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만물박사] 항왜 김충선을 아시나요? (feat.임진왜란)

by GDBS 202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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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かとうきよまさ · 加藤清正)의 우선봉장으로 참전하였으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통해 조선에 귀화하였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적을 물리치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조선을 위해 66세까지 전장에 나가 싸웠다. 선조에게 친히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까지 올라 그 공을 인정받았다.

 

김충선 그는 누구인가?

 
 

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했다. 왜군들은 명나라로 가는 길이니 길을 내달라 했고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중화의 본가를 치겠다는데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응할 리 없었다. 당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とよとみひでよし · 豊臣秀吉)는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대륙 침략전쟁을 명했다. 동아시아 전체의 맹주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뎃포(てっぽう)'(중국에서는 '조총'이라고 부름) 신무기를 앞세운 3천여 명의 왜군은 거침없이 몰려들었고, 칼과 창을 내세운 조선군은 신무기를 당해낼 수 없어 부산진은 함락되었다. 침략자들의 선봉에는 조총부대의 대장, 사야가(沙也可)가 있었다. 그런데 부산진 함락 후 그 공포의 인물은 몇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얼마 후, 한 과묵한 장수의 명령 아래 이번에는 조선군이 조총을 들고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공세에 왜군은 당황했다.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몰고나가 왜적이 점령한 18개 지역의 성을 탈환했다. 훗날 사람들은 말없이 조선군을 이끌던 장수, 베일에 싸였던 그 인물이 바로 홀연히 사라졌던 스물두 살, 일본의 사무라이 사야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이름이 김충선이라는 것 역시 밝혀졌다.

일본인 사야가

당시 사야가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 사야가 가문도 일본에서 사라졌다. 그의 글이 실린 에도 사야가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나와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사야가의 과거를 복원하려 나섰다. 그 결과 두 인물로 좁혀졌다. 스즈키 마고이치 또는 하라다 노부타네, 이들은 임진왜란 출전 이후 행적이 묘연해진 인물들이다.

 

김충선의 시문집 <모하당문집>. 1798년(정조 22) 6대손 한조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842년(헌종 8) 중간되었다.

스즈키 마고이치라는 주장은 사야가가 조총 전문가였다는 단서에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에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쏘는 철포부대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와카야마(わかやま · 和歌山) 현의 '사이카'라 불리는 부대가 전국적으로 위력을 떨쳤는데 그 조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초토화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히데요시의 지배에 반발하는 영주와 친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이카 부대의 대장이 스즈키 마고이치, 바로 사야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스즈키 마고이치는 출정 이후 행방불명됐다.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주장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인연이 드러난다. 일본의 전통가문인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강압적으로 히데요시의 측근인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에 예속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가토 기요마사를 원수로 여겼을 것이고,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임진왜란을 명분없는 전쟁으로 보았다. 그리고 왜군들이 무고한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을 보고 큰 회의를 느꼈다. 에 의하면 "사야가는 전쟁중에 본인의 목숨보다 부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늙은 부모를 등에 업고 도망치는 조선인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5백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조선인 편에 선다.

조선에 귀화해서 싸우겠다는 적장의 편지를 받은 병마절도사 박진은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사야가는 왜군들에게서 가져온 조총으로 조선군을 훈련시켜 조총부대를 만들었다. 그는 사기가 떨어진 관군을 격려하면서 한편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의병들을 끌어들여 부대를 새롭게 훈련시켰다. 초총의 사용법뿐 아니라 조총과 화약의 제조기술을 전수했다.

 

 

이순신의 에는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듬해 조선군이 왜군의 조총을 모방해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일본의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의 군사들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해졌다. 거기에는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 항왜(항복한 왜인)의 역할이 컸다. 김충선 외에도 에는 40명이 넘는 항왜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조선인으로써의 김충선!

사야가는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곳곳에서 다양한 전략과 전술로 일본군을 놀라게 했다. 경상도의 의병들과 힘을 합쳐 경주의 이견대 선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과거 자신을 지휘했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군대를 섬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사야가가 있었다. 사야가가 이끄는 군사들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연달아 승전보를 전해오자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다.

1598년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사야가의 공로를 인정해 벼슬을 내렸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새로운 이름은 '김충선'.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는 의미를 담아 김씨 성을 주었고 바다를 건너왔다 하여 본관을 김해(金海)로 하였다.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加)에 모래(沙)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착상한 선조의 기발한 작명이었다.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 하여 충선(忠善)이라 하였다. (김충선 가문은 김해김씨이지만 수로왕의 후손들이 아닌 까닭에 특별히 앞에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붙여 '사성 김해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는 젊은 장수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담력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공손하고 삼간다."

 

조선시대 김충선에 대한 인식

김충선에 대한 조선 시대 인식은 『선조실록(宣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관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는 '첨지 사야가'로, 『승정원일기』에는 '항왜장 김충선' 또는 '항왜영장(降倭領將) 김충선' 등으로 각각 표기하고,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에서 활약한 김충선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항왜로서 적극적으로 활약한 김충선에 대해 조선 정부 역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조정에서 내린 포상이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의 활약으로 가선대부와 자헌대부에 오르고,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 후 정유재란과 북방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에 힘쓴 공을 인정받아 정헌대부에 올랐다. 이괄의 난 때에는 사패지를 하사받았으나 고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하사받은 김충선은 이후 향촌 지역 내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재지사족들은 자신들 주도의 향촌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향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하나가 서원(書院) 건립과 운영이다. 서원 건립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제향(祭享)의 대상, 즉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성격이다. 김충선은 국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은 인물로 충분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1794년(정조 18) 김충선의 후손들과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내 유림들은 녹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녹동 서원에서 그를 추모함과 동시에, 서원을 중심으로 향촌 사회 활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녹동 서원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훼철되었으나, 1914년 중건되었다. 1972년 서원의 규모가 협소하다 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100m 떨어진 현재의 위치[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로 이건해 증축되었다.

 

한편, 김충선의 후손 김한조(金漢祚)가 그의 글과 필적을 모아 1798년(정조 22) 『모하당집』을 간행하였다. 18세기 후반 영조·정조 시기,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운 인물을 현창(顯彰)하는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김한조 등 김충선의 후손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모하당집』을 간행하여 김충선의 존재를 조정과 향촌 내에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42년(헌종 8) 개수본 발행 역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모하당집』 간행을 계기로 김충선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전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규상(李奎象)[1727~1799]이 쓴 『병세제언록(幷世諸彦錄)』을 보면 외국에서 조선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이나, 그 후손들에 대해 기록한 「우예록(寓裔錄)」과 「풍천록(風泉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우예록」에 김충선이 기술되어 있다. 이 밖에 김진항의 『미산 전집(麋山全集)』에 수록된 「김장군 충선록(金將軍忠善錄)」, 이의연의 『이재집(頤齋集)』에 수록된 「김충선전(金忠善傳)」,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집(青城集)』, 성해응의 『연경재 전집(硏經齋全集)』에 실린 「김충선(金忠善), 귀영가(貴盈哥)」 등에서 김충선을 다루고 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서른 살의 김충선은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해 녹촌(오늘날의 대구 달성국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했다. 임진왜란 후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김충선은 1603년부터 10년 동안 자원하여 북방의 국경을 지켰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이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했던 항왜 자손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군사를 모아 후금의 군대에 맞서 적군 50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후금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우의 대의도 끝났구나" 대성통곡하며 다시 녹촌으로 돌아갔다.

 
조선인 김충선, 일본인 사야가. 두 이름은 모두 일본 역사에서 지워졌다. 일본의 입장에서 사야가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이자 반역자, 매국노 였다. 일제 사학자들은 김충선이 조선이 만든 허구 인물이라고 했다. 지워진 이름이 복원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김충선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녹동서원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김충선 귀화 400주년이 되던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녹동서원 위치정보]

ㅇ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
ㅇ 연락처: 053-659-4490
 

 

이후 일본에서는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에는 동시에 한국과 일본이 교과서에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를 실었다. 2012년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옆에 '한일 우호관'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본 관광객이 대구에 가면 꼭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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